우리 옛이야기 중에 이야기 귀신이란 짧은 얘기가 있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꼭꼭 담아두면 이야기에 사특한 기운이 깃들어 말하지 않는 이를 해코지 한다는 내용이다.

 

말할 시기를 놓쳤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은 지 보름이 지났다. 처음엔 무어라 말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흐른 뒤엔 그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으로 변했다.

 

소설과 영화의 말하는 방식은 다르다. 소설이 문자 언어가 수단이라면, 영화는 모두 알고 있듯 영상이 수단이다. 김훈의 소설 화장에는 죽음과 삶, 그리고 그 가운데 길을 잃은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길을 잃었다기보다 자신의 위치가 정확히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고 있다. 오줌발이 노쇠한 그의 몸이 그가 서 있는 곳을 증명한다.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몸은 도대체 어떤 몸일까. 그의 회사에 신입으로 들어온 추은주는 쇄골의 은근한 관능으로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몸이다. 그녀와 대조적으로 두 번 뇌종양 수술을 겪고 가족과 이생에서 정을 끊어버리듯 메마르게 죽어가는 식물 같은 몸을 지닌 그의 아내는 죽어가는 몸의 증거다. 아내를 묘사하는 그의 말하기 방식은 짧고 건조하고 냉철하다. 그에 비해 추은주를 말하는 방식은 길고 윤기 있고 유려하다. 그에게 추은주는 존재하지만 잡을 수 없는 신기루이며 환상이다.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를 죽음이 깔려있는 그의 삶에서 잠깐 그녀를 바라보는 시간은 잔인한 여기를 잊는 시간이다. 암세포가 살아있는 몸에 기생한다는 것은 죽음과 삶이 다른 문제가 아니라 삶의 도처에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 증명이다. 죽음에 끄달리지 않으려고 우리는 추은주와 같은 헛것에서 위안을 얻고 삶을 지탱하는 게 아닐까. 김훈의 냉철한 문장에서 엄연한 사실로서 죽음을 목도했다면,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 나는 관객을 몰아치는 드라마 한 편을 보고 난 뒤의 피로를 느꼈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 배우가 어디 위치하느냐는 관객의 감정을 자극한다. 또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배우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차면 떨리는 눈빛과 찡그린 눈살에 인물의 감정을 느끼며 영화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아쉬웠다. 소설과 영화의 말하기 방식이 분명 다름을 알면서 어떤 기대를 가졌다. 영상에서 감정을 촉감하고 싶었지만, 은근한 관능은 노골적인 관능으로, 살아있다는 증명이 대단한 화법이 아니라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임을 느꼈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삶과 죽음의 대비가 극명해서 영화가 끝났을 때 감정의 여진이 몸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제까지 달아오른 기온을 식혀주는 비가 내립니다. <문화 공감> 5월 첫 모임을 알립니다. 소설과 영화의 감동을 이어 취재와 자료에 충실한 리얼리스트 김훈 작가의 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을 읽습니다.

 

1. 시간 : 5월 12일 화요일 저녁 7(1,3주 모임인데, 첫주 화요일이 어린이날인 관계로 연기)

2. 장소 :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실 (신천3동 치안센터 옆)   

3. 준비물 :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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