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가을밤 달빛과 가로등이 교직하는 유리창을 등지고, 같은 곳이 빛나지만 사람이 보기에 따라 반대로 빛나는 상현달 같은 영화 한 편 보시렵니까?
<대구환경운동연합>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이고, 어떤 사람들이 모인 곳인지 몰라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피켓 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만 모인 무서운(?) 곳이 아닙니다.
익명성의 회색 도시에서 아마존 같은 숲이 되고자 노력해 왔던 <대구환경운동연합>이 좀 더 다양한 여러분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마련한 자리입니다.
영화 한 편을 감상하고, 느낌을 안주 삼아 취할 수밖에 없는 나와 너, 우리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잡담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사회의 상처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영원히 소금을 발라대는 존재”로서 예술가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2005년 작품 <히든>은 스릴러물에 흔한 자극적인 장면과 심장을 조이는 음악이 없지만,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영화입니다.
감독은 말합니다. “당신이 <히든>을 다 보고나서도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지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던지는 오스트리아의 거장 미하엘 하네케 감독과 벌이는 게임에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 시간: 2015년 10월 23일(금) 저녁7시
- 장소: 대구환경운동연합 2층 사무실
- 영화: 히든(Hidden) /미하엘 하네케/ 2005
- 도움 주는 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게으를 수 있고, 자유롭게 자유로울 수 있는 자유주의자 ‘한가한씨’(회원, 대구씨네필 대표)
'꿈' 같은 영화, '꿈'같은 영화관...
영화를 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동네 극장을 찾거나 케이블 TV를 시청하거나 유료 사이트에서 다운 받아 편안하게 컴퓨터나 TV에 연결해 거실 소파에 누워 보거나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다운로드해 노트북으로 감상하거나 DVD를 구입해 다양한 정보를 얻으며 관람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영화 상영 사이트에 가입해서 보는 방법도 있다. 극장에 가거나‘주말의 명화’ 시간이 아니면 영화 보는 방법이 제한되던 시절과 달리 영화는 흔한 ‘상품’이 되었다.
2015 회원확대운동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던 <달빛 드는 영화관>은 냉정하게 평가하면 실패로 끝났다. 참석자의 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명백하게 잘못 기획 되었다. 기획자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선 주차장도 없는 대중교통의 접근성이 낮은 사무실까지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이 드물 것이란 점, 영화를 보는 방법이 다양하므로 굳이 계단이 가파른 사무실까지 올 필요가 없다는 점, 대부분 영화는 즐거운 오락거리이기에 두 시간동안 고통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 적을 것이란 점을 무시했다. <대구환경운동연합>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영화라고 스스로 위안 삼았지만, 선정한 영화는 결코 가벼운 작품이 아니었다. 작품 선정 역시 오롯이 기획자의 판단이 낳은 과오다.
그러나 위의 모든 실패 요인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만족스러웠다. 어느 날 불쑥 일상에 던져진 비디오 테이프는 한 가족을 천천히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혼란은 일상을 교란시키고, 가장의 개인사와 알제리와 얽힌 프랑스 역사가 미묘하게 얽혀있음을 반복 확장되는 꿈을 통해 보여준다. 촬영된 영상과 실제 영화의 경계가 모호하고, 텔레비전 방송과 뉴스 화면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 조르쥬의 직업은 방송인이면서 자신의 방송을 편집하기도 한다.
테이프를 누가 보냈을까? 라는 질문을 표면에 던지며 영화는 관객을 범인 찾기에 몰두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영리한 감독의 트릭이다. 진실로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스릴러와 드라마가 섞인 장르지만 영화에는 의례적으로 깔리는 음악이 없다. 카메라의 시점과 거리는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관찰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눈 대화에서 회원들은 하나같이 불친절한 영화에 대해 애교 섞인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영화가 우리에게 다양한 생각거리를 주었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선명한 화질의 블루레이를 구입하느라 고생한 도우미 한가한씨의 감독 미하엘 하네케와 영화에 대한 설명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점이 어디인가를 알 수 있는 길잡이였다.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 혹은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진실’혹은 ‘사실’일까요?
조르쥬의 꿈에 크로키처럼 영화 초반 등장했던 입 주변에 피를 묻힌 어린아이 모습은 영화의 진행과 더불어 확대되었다. 그것은‘진실’인지 가늠할 수 없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조르쥬의 죄의식이 ‘꿈’을 만들었는지 혹은 강박이 구성한 왜곡된 진실인지 관객은 모른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게 만드는 방송 역시 편집자의 의도에 의해 삭제와 덧붙임으로 일그러질 수 있다. 더구나 비디오테이프와 영화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은 미하엘 하네케 감독이 자주 언급했던 “영화는 1초에 24개짜리 거짓말이다”란 말이 떠올라서 서늘했다. 또, 이 영화가 우리가 믿고 있는 (객관적)‘진실’에 대해 질문하는 지점은 국사 교과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첨예한 대립을 비추는 듯하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 가, 말하는 사람에 주목하고, 말의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쉬움을 가득안고 끝난 <달빛 드는 영화관>. 영화를 틀면 어디나 극장이 되고, 영화가 끝나면 어느 곳이나 토론하는 카페가 되는 그런 영화관을 꿈꿨다. 하지만 ‘꿈’은 깨지기 쉬운 유리 같다. 그럼에도 ‘다음’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