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첫 모임은 지난 5월 19일 귀천 8주기 였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의 산문을 읽습니다.

밑줄 그은 대목을 나누어도 좋고, 조금은 물고 늘어지는 토론이어도 좋습니다.

함께 해요~


1. 시간 : 2015년 6월 16일 오후 7시

2. 장소 : 사무실 2층

3. 주제도서 : <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 녹색평론사 - 읽을 수 있는 만큼 읽어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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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있었던 <문화공감> 후기는 아래 이상용 회원님의 영화 감상글로 대신합니다.


부자의 자선과 빈자의 증오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영화 <<윈터 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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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무거운 논제를 던지는 영화이다. 부자와 빈자의 대립, 부자들의 개별적 성격의 차이와 갈등, 이념과 행위의 배반으로 인한 자기기만과 위선, 빈자들의 행위에 대한 평가 이런 무거운 주제들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거기에다 3시간 반에 가까운 긴 러닝 타임, 단색조에 가까운 장면 구성, 끊임없이 지루하게 전개되는 인물들 간의 갈등과 논쟁에서 오는 많은 대사들 모두가 관객을 힘들게 하는 요소들이다. 그럼에도 다행히 사진작가 출신인 세일란 감독이 그려내는 뛰어난 미장센과 아름다운 영상, 알프레드 브렌델이 연주하는 슈베르트 피아노소나타 한 곡만으로 구성된 단순하고 명징한 선율의 아름다움이 관객들을 영화로부터 붙잡아 두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세일란 감독은 영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같다. 이렇게 무거운 주제들로 3시간 반을 끌어가면서도 관객들을 화면에 붙잡아둘 수 있는 힘이 감탄스럽다. 직접 쓴 각본, 적절한 배우들의 캐스팅과 연기력, 뛰어난 장면 구성(Mise-en-Scène)과 영상, 장면과 타이밍이 딱 맞는 음악에 이르기까지 과연 권위를 자랑하는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영화라는 데에 한 점도 이견을 달 수가 없다.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의 가파도키아에서 오셀로(Othello)라는 이름의 작은 호텔을 경영하는 주인공 아이딘. 젊을 때는 오랫동안 연극배우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호텔 외에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가난한 세입자들에게서 월세를 받고 있는 지역의 유지로서, 지역 신문에 칼럼도 쓰는 등 부유한 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 니할은 남편의 재력과 지명도에 힘입어 지역의 자선사업가로서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딘의 여동생 역시 외국유학까지 한 인텔리로서 이혼 후 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일견 모자랄 것 없이 평화롭고 원만해 보이는 이들 일가. 어느 날 호텔매니저와 함께 외출한 길에 한 세입자의 아들이 그들의 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아이를 데리고 처음으로 가난한 세입자의 집을 찾는 것을 계기로 점차 이들의 위선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영화라기보다도 한편의 스케일 큰 고전 연극을 보고난 기분이다. 선이 굵은 소수 등장인물들의 뚜렷한 성격 차이와 갈등, 갈등으로 인해 계속되는 논쟁과 말다툼, 영화로서는 비교적 단순한 사건의 전개, 그리고 배경이 되는 주위 환경과 음악의 디자인 된 듯 단순한 아름다움 -이런 요소들이 모두 다분히 연극적이라는 느낌이다. 특히 Othello라는 호텔 이름이나 여러 번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대사의 인용 등이 셰익스피어 연극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고 보니 주요 등장인물들이 셰익스피어 연극의 주인공들을 닮은 것도 같다.

 

부자와 빈자 간 대립구도와 이러한 상황 하에서 부자들의 의식과 행태가 보여주는 위선과 자기기만은 이 영화의 중요한 테마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전근대적 사회에서 부자와 빈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서 구조적으로 이분화 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평등이나 휴머니티와 같은 근대적 이념이 존재하지 않던 사회이기에 부자들의 빈자에 대한 비인간적 지배행위(경제적 수탈과 폭력적 가학행위로 특징지어지는)를 제어할 장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부자와 빈자 간에 경제적 계약 관계 뿐, 다른 지배적 종속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부자가 빈자를 비인간적으로 취급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월세를 내지 못한 세입자는 가재도구를 압류 당하거나 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던 집에서도 하루아침에 쫓겨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모욕이나 폭행을 당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부자주인들은 과거와 달리 직접 나서지 않고 변호사나 용역업자 등 그런 궂은일을 대신해주는 전문 기술자들에게 맡긴다. 그리고 이런 일과는 무관한 척 자선사업이나 무슨 그럴 듯한 명분으로 빈자에 대한 지배자로서의 불명예스런 행위부분을 덮어버린다. 영화에서 아이딘이 지역 신문에 그럴 듯한 내용의 칼럼을 기고하고 때로 자선행위를 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장은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발생하여 그 위장막이 걷히면 여지없이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그동안의 자선행위나 그럴 듯한 명분들에도 불구하고 빈자들에 대하여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할뿐더러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이 실체(fact)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자선행위를 예로 하여 부자들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를 신랄히 꼬집는다. 예를 들어 아이딘의 부인 니할은 지역의 유력한 자선사업가로 자선모임을 주도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자기만족과 도취를 위한 놀이도구일 뿐, 빈자들의 본질적 고통이나 괴로움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영화 후반부에서 밤중에 이맘 함디의 집을 찾아가서 집 한 채 값이나 되는 거액의 돈을 주는 장면이 그렇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부자들이란 모든 것을 돈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려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테니 돈만 주면 무조건 고마워하고 덥석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마이클 샐든이 말하듯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고 사서도 안 되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는 것을! 니할은 자신의 자선사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남편에 대하여는 아무런 애정도 감사도 보이지 않는다. 애정이야 그럴 수 있다 치고, 자신의 삶과 일(자선사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남편에게 아무런 감사의 마음도 갖지 않고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선에 과연 진심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기만적이고 위선적이기는 아이딘의 여동생 네즐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외국에서도 공부하고 지적 수준이 오히려 아이딘보다도 더 높은 수준이다. 아이딘의 위선적 측면에 대하여도 상당히 비판적이다. 얼핏 보면 빈자들에 대하여 매우 배려심과 관용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새로 온 하녀가 자신이 아끼는 유리그릇을 깨뜨렸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의 위선적인 측면이 드러난다. 즉 하녀의 급여로부터 그릇 값을 떼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관용도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저항하지 않음으로서 (그 악인의 마음 속으로부터) 선을 끌어낸다는 논지를 말할 때 과연 그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대립구도 상에 위치한 빈자들에 대하여도 잠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이 영화는 빈자들은 돈은 없지만 자존심은 살아있으며 그것은 돈과 바꿀 수 없는 가치임을 말하고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 가치의 크기는 다르다. 함디 형제 중 동생인 이맘은 비교적 유연한 입장을 갖고 타협적이 되려고 하는 반면, 그의 형 이스마엘은 강고하다. 부자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자존감과 명예를 해치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 비타협적이고 공격적이며 그 눈은 적의로 불타는 것 같다. 니할 앞에서 집 한 채 값의 지폐뭉치를 불 속에 던지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옳은 것인지 아닌지, 이스마엘과 이맘 중 누구의 행위가 더 바람직한지는 보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영화는 부자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빈자들의 행위에 대하여는 판단의 준거가 될 만한 암시가 주어지지 않는다.

 

여러 가지 논점을 제시하고 있지만 물론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감독이 직접 나서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평가와 판단은 관객의 몫일 것이다. 혹자는 아이딘 쪽에 설 수도 있고 혹자는 이스마엘을 옹호할 수도 있다.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동생 이맘 함디가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의 미래는 어디일까? 아이딘 쪽의 미래는 비교적 단순하게 예측된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갈 것이다. 여전히 부와 명예를 갖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으로 살 것이다. 아이딘과 니할은 이혼하고 헤어질 지도 모르지만 니할은 또 다른 아이딘을 찾을 테니까. 함디 집안은 어떻게 될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그들의 미래는 결국 일리아스(이스마엘의 어린 아들)이다. 가난 속에서도 일리아스는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수학을 좋아하니 기술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렁저렁 자신의 아버지보다는 좋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빛을 볼 때 더 상황이 나빠지면 이슬람전사가 될 가능성도 있다. 나는 일리아스가 이슬람전사가 되지 않고 기술자가 되어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겠지만.

 

p.s. 영화의 마무리가 약간 허술하다는 생각이다. 니할과 헤어져 이스탄불로 떠나려던 아이딘은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니할에게 용서를 구한다. 글쎄 이게 좋은 결말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서로 헤어져 다른 길을 가는 게 좋은 것도 같고, 아이딘의 말처럼 어떻게든 이 중요하니 마음을 추스르고 그럭저럭 한 집에 사는 게 좋은 것도 같고.

[출처] 부자의 자선과 빈자의 증오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영화 <<윈터 슬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