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정간사님과 장간사님은 꾸러기답사 장소 알아보러 고령으로 가고, 공처장님은 서울에 사무처장단 회의가고, 구국장님과 나만 사무실로 출근했다.

 아침부터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린다. 저녁에 있는 폴 콜먼 강연회 때문에 회원들과 언론사에서 이런 저런 문의가 많다.


 그 와중에 남문 회원의 전화가 기억에 남는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검찰의 시민단체 표적수사에 환경운동연합이 걸려든 것에 대해서 울분을 토하시면서, 그동안 생업이 바빠서 회원활동을 제대로 못했는데 앞으로는 조금 더 열심히 활동해야겠다고 하신다.

 전화를 끊고 나서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촛불이 꺼지고, 촛불에 열광하던 진보진영들의 위기가 닥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들이 많다. 그러나 모든 위기는 내적 조건과 외적 조건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탓만으로 돌리기엔 지난 10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잃어버린 10년은 그들이 외치지만, 정작 그 10년 동안 진보진영이 잃어버린 것이 더 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전화를 받으면서 컴퓨터 작업에 매달렸는데, 어깨가 너무 아프다. 잠깐씩 일어나 풀어주긴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탓에 금세 어깨가 굳는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갑자기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서비스직 여성노동자들에게 의자를 주자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작 며칠 일했다고 이렇게 어깨가 아픈데, 몇 년에서 길게는 몇 십 년을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 노동은 이중으로 억압받는다.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경제적 불이익을 당하는 것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부장적 인식에 당하는 차별이 그것이다. 여성들의 노동은 친절, 미소, 상냥함 따위의 감정노동을 반드시 포함한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여성노동자들이 의자 없이 일해야 하는 것 역시 그런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의자에 앉아서 일한다고 해서 노동의 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데도, ‘감히 여자 종업원이 손님을 앉아서 맞아?’라는 가부장적 의식이 그들을 하루 종일 서 있게 만든다.

 한참동안 내가 앉아서 일하는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루빨리 앉아서 손님을 맞는 여성노동자들을 볼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폴 콜먼 강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행사장인 공간 앞산달빛에 6시쯤 도착했다. 미리 가서 행사장도 좀 치울 요량이었는데 웬 걸, 앞산꼭지에 계신 분들이 벌써 말끔하게 청소를 마치셨다. 그 분들의 수고로움이 너무도 고마웠다.


 7시를 조금 지나서 폴 콜먼 씨 일행이 도착해서 강연을 시작할 수 있었다. 행사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시종일관 유쾌하고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강연회를 들으러 온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갓 8개월 된 아이를 안고 온 부부부터, 아이들,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 직장 마치고 바로 뛰어온 사람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까지.


 행사를 함께 공동 주최한 앞산꼭지(앞산을 꼭 지키는 사람들)가 지역 속에 뿌리내리는 조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 운동이 지역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함께 어우러지는 운동을 지향해 온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가치실현은 늘 이렇게 현재진행형이다. 대구환경운동연합이라는 조직의 지향은 어떠해야 하나, 그 조직의 정체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갖가지 고민들이 스쳐간다.


 9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행사가 끝이 났다.

 집으로 가려고 보니, 아차, 사무실에서 잊고 가져오지 않은 책이 생각났다. 내일 꼭 읽어야 하는데...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책을 챙겨 나오는데 구국장님이 골목에서 걸어나온다. 폴 콜먼씨 일행을 숙소까지 바래다주고 차를 가져다 놓고 나오는 길인가보다. 고생했다고 인사를 건넸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힘들었을 텐데 환하게 웃는다.

 ‘참, 성격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