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달력을 넘기고 마지막 남은 한 장이 눈앞에 드러났다. 그런데 이 연말연시를 맞아 일년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기는 호사는 고사하고 정말 책 한 자 읽을 시간이 없다. 망할!

 사실, 요즘 내가 내 정신이 아니다.

 조직이 거듭 나기 위해 지혜를 긁어모으는 상황이다 보니, 별 도움 안 되는 고양이 손일지언정 같이 고민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머리가 무겁다.

 또, ‘회원의 밤 준비’를 비롯해, 하루도 빠꼼할 날이 없는 행사 일정에 몸이 단다.

 거기다가 올해처럼 큰 변화가 있었던 해엔 내 삶을 꼼꼼하게 평가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내년 한 해의 삶도 잘 계획할 수 있을 텐데, 아무 것도 손대지 못하고 그저 답답해하고만 있다. (정말 이 와중에도 다이어리를 정리하지 못해 안달하는 내 결벽증이 나도 싫다.)

 그런데 정말 이 난리 통에 나를 확 돌아버리게 만드는 일이 생겼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일이 시작된 건 일 년 전이다.

 일년 전, 내가 처음 환경운동연합 회원으로 가입할 즈음 그 일이 시작됐다.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이 내게 호감을 표시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예의상 직접 만나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그 거절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계속 주위를 맴돌며 문자를 보내오고, 선물을 받아달라는 둥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몇 번을 거절하다가 급기야는 화를 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상대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의심이 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이거 스토커 아냐?’

 과거에도 스토킹을 당해본 경험이 있어서 내 직관이 그 걸 먼저 감지했다. 전문심리상담가인 아시는 분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 남자의 상태가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하는 병리적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제 3자를 통해서 정신과 상담을 받도록 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스토킹은 타인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평범한 애정공세로 보이기에 섣불리 대응했다가는 오히려 피해자가 비난을 받는다. 그래서 나 역시 섣불리 속단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내 분노는 점점 커졌다.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싫다고, 싫은 정도가 아니라 벌레보다 끔찍하다고... 욕을 하고,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하고, 마지막엔 악에 받쳐서 죽어버리겠다고 울기까지 했다.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면 그 남자는 사과를 하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 힘들다고 넋두리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위로의 말을 건네면 그 말을 미끼로 자기 감정을 합리화해서 다시 나에게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 일을 딱 일 년 동안 겪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힘든 상황을 나 자신조차도 기특할 정도로 잘 견뎌냈다. 내가 언젠가는 이 일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천만에... 스토커들은 질기다.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않는 걸 잘 안다. 내가 그 지긋지긋한 일을 나름 담담하게 겪어낸 건 일 년 정도 반복되면 다른 사람들도 심각성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들이 심각성을 인정하며 그를 상대로 공개적으로 싸워도 되는 것, 그게 내가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처음엔 내 예민함이 과한 반응을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그 남자가 표현이 조금 서툰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는 함께 대응해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지지받지 못했던 내 지난 1년은 어디서 보상받나? 그리고 가부장적 시선으로 내게 ‘네가 꼬리를 쳤겠지?’라며 나를 힐난할 그 편견의 시선들은 또 어떻게 견디나... 그 생각에 며칠 동안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 상황들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용기를 낸다. 나에게 ‘나’가 누구인가? 나에게 ‘나’가 어떤 존재인가?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해도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세상 모두가 비난해도 나의 정당함을 알아주는 존재가 아닌가. 그 내가 내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는데, 그 자존감으로 지금껏 살아왔는데 내가 왜 이 우울함을 떨치지 못하는가.


 자존감을 되찾고 이 글을 쓰다보니, 나를 돕겠다고 했던 지인들이 떠오른다. 미처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던 그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래, 이 감정이다. 힘을 내자. 비난 따위, 오해 따위 겁내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해결하자. 대충 덮고 쉽게 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나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기세로, 회원의 밤 행사도 더 열심히 준비하고, 조직 쇄신안도 더 열심히 고민하고, 내년 계획도 자알 세워보자. 차정옥, 파이팅!


 * 제가 아직 피해자 심리에서 다 벗어난 게 아니니 이 글에는 어설픈 충고나 조언은 달지 말아주세요. 한 마디 하시고 싶다면 제 용기를 지지하고 격려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