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수요일


 어제 저녁부터 요네하라 마리의 <대단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언제 사 둔 것을 지금에야 잡는다.

 700페이지 분량의 두께도 두께지만, 책 서평을 모은 책이다 보니 선뜻 잡기가 힘들었다. 새로 일을 시작한 지금, 일에 에너지를 집중해야하는데 이런 책을 읽으면 서평가가 소개한 책들을 모두 읽고 싶은 욕망이 마구 일어서 책 읽을 시간이 모자란 삶이 불만스러워진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제 무덤을 파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서재를 드나들 때마다 나에게 유혹의 눈짓을 보내는 이 책을 손에 잡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때마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나만의 주문.

 “내가 이 책을 고른 게 아니야. 이 책이 나를 골랐어. 그러니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그럼, 그렇고 말고.”


 참다가 만난 문장들이기 때문일까? 얼마나 재미있는지 한 줄 한 줄이 너무도 달콤하다.

 역시, 요네하라 마리야.

 요네하라 마리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권하고 싶다. 나 역시 그 책 한 권으로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그 책을 읽을 당시 만나는 사람들마다 책제목을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상과 현실, 이념의 무게와 삶의 가벼움,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된 지금,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자유주의자……. 그 모든 명제들을 동시에 사유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책이다.


 다 좋은데, 예상대로 소개된 책들을 읽고 싶어서 미치겠다. 아, 알라딘에 들어가서 장바구니에 마구 마구 책을 퍼 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잠이 안 왔다.


 아침, 창을 여니 모처럼 반가운 단비가 내리신다. 고마운 하루다.


 내일 ‘종부세완화반대’ 서명을 받을 때 쓸 피켓을 만드느라 하루를 꼬박 보냈다. 피켓에 들어가 문구를 찾느라고 자료를 뒤적거리다 보니, 이명박 정부가 가지고 있는 확고한 부자들의 철학이 명확하게 읽힌다.

 상위 10%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계급성에 기반한 철학, 자신들의 부를 지켜줄 정책을 지지하고, 철저하게 부의 논리에 따르는 정치인을 찍는데, 왜 80%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의 계급성과 반대되는 선택을 할까? 부의 획득을 개인의 성실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우리 사회는 개인의 가난은 여전히 그의 게으름으로 돌리는 의식이 지배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의식조차도 권력과 자본에 순응하게 만드는 교육, 건강하지 못한 여론생산 구조, 대안을 찾지 못하는 정치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하니 갑갑하다.

 그러나 갑갑하다는 생각만 한다고 이 갑갑함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 그저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해야 할 밖에. 어차피 세상은 해야 할 일을 하는 소수의 영웅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다수의 다중들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 테니.


 피켓을 만들고 있을 때, 윤병로 회원이 지나가다 들르셨다. 내가 피켓 만드는 옆에서 내내 나를 즐겁게 해 주시고는 가셨다. 윤병로 회원과 나는 색깔이 참 많이 다르다. 그런데도 이 분이 좋았던 까닭이 무얼까 생각해봤다.

  내 연배의 남성들은 대부분 정치적 성향이 우든, 좌든 상대의 의견이나 성향 따위는 관심 없이 오로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는 대화를 한다. 그런 사람들과 얘기를 하면 나는 입을 꼭 다무는 편이다.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과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윤병로 회원은 자기의 의견이나 성향을 드러내기 전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먼저 살핀다. 그것도 자신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상대의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려 한다. 아마 대화할 때 그 자세가 끌렸던 것 같다. 이런 사람은 정치적 성향이야 어떻든 대화가 즐겁다. 똘레랑스가 별 건가, 이런 게 바로 관용 아닌가.  


 홈페이지를 만들어준 준호씨가 이 달 말에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떠난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시민단체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인은 자기가 한 일이 별 거 아니라고 하지만, 홈페이지 때문에 몇 년이나 힘들었던 활동가들로서는 고마움이 너무 커서 밥이라도 한 끼 사고 싶다고 했다.


 저녁에 준호씨와 시내에 나가서 밥도 먹고 차도 한 잔 했다. 준호씨와 대화를 하면 늘 느끼는 게 이 친구가 이십 대 대한민국 청년이 맞나, 하는 거다.

 내 큰조카랑 동갑인 이 친구랑 이렇게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일본 우익과 한국의 우파들이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시작으로, 친일파 청산, 한국 정치의 몰계급성, 언어가 불평등을 조장하는 현실, 이상, 꿈, 사랑에 이르는 얘기를 단 한 순간 끊어짐도 없이 나눴다.

 이렇게 나이 따위 상관없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대화를 나누고 나면 충만한 기운이 온 몸을 채운다. 정말 너무 멋진 친구다.


 찻집에서 나오니 비가 그쳤다. 좀 더 내려도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