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자전거를 배웠는지는 기억이 삼삼하다.
그러나 자전거를 처음 타게 되었던 그 날의 느낌만큼은 생생하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고 그 힘으로 평형을 유지하면서 페달을 밟아 바퀴를 굴린다.

몇 번 기우뚱거리고 넘어지면서 마침내 비실비실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
"야~ 간다! 간다!" 저만치 가다가 신이 나서 뒤돌아본다. 멀리서 자전거를 잡고 있던 이가 환하게 웃고 있다. "엥? 안잡고 있었어? 나 혼자 온거야?" 순간, 와당탕 넘어지고야 만다. 속았다는 배신감보다 해냈다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다. 누구나 그렇게 자전거를 배웠을 것이다.


자전거에 대한 첫 기억은 내가 다섯 살 때다.
추석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엄마와 언니들이 열심히 송편을 빚고 있었던 걸 보면.
어린 내가 어지간히 저지레를 했는지 아부지는 핸들 쪽에 부착한 아이용 안장에 나를 태우고 근처 달성공원으로 드라이브를 시켜줬다. 빠른 속도로 휙휙 지나가는 희한한 세상! 햇살도 나무도 공기도 달라보였다. 달성공원 담장이 그렇게 낮아 보일 수없었다. 그 넓은 달성공원이 우리집 마당 같이 여겨졌다.

아부지 가슴팍에 싸여 시원한 바람을 맞는 일이 참 행복했다. 때문에 자전거는 나에게 ‘부성(父性)’처럼 여겨진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일곱 살에는 아부지가 자전거로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등굣길은 늘 복잡하고 비좁았다. 한날은 어설픈 부모가 자전거로 아이를 등교시키다가 아이 다리가 바퀴에 휘말려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왜 안장을 제대로 안 하고 다니느냐고 불같이 화를 내며 간섭하던 아부지를 기억한다.

어스름 골목길에 “따릉따릉~” 자전거 소리가 들리면 그것이 곧 아부지란 걸 알아차렸다.
어떤 날에는 다섯 남매가 퇴근하는 아부지를 마중 나갔다. 마침 써커스 구경을 하느라고 아부지 마중은 다 잊어버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코끼리와 차력사 구경을 하다가 아차! 하면, 아부지가 자전거에 탄 채 웃으면서 코찔찔이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와 다섯 남매가 동네 선술집에 우~ 몰려가서 술 취한 아부지를 데리고 오는 날에는 굳이 내가 자전거를 끌고 왔다. 콩알 만 한 키에 자전거를 못이기면서도 그렇게라도 자전거를 몰고 싶었다. 우리 어릴 적에는 지금처럼 자전거를 갖고 있는 아이가 드물었다. 두류공원에나 가야지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었고 대여료를 내야 했기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무살이 되면서 자전거는 낭만이 되었다.
반짝거리는 새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오가는 선배가 어찌나 멋있어 보였는지. 잔디밭에 앉아 선배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날에는 모든 잔심부름을 당연히 자전거 가진 그 선배가 도맡아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다주겠다던 선배가 나를 태우고 낑낑거리며 오르막을 오를 때, 땀 흘리는 선배의 등이 참 따뜻해 보였다. 자전거 뒤에 앉으면 등을 꼭 잡아야 하므로, 앞뒤로 나란히 앉은 사람들은 와락 밀려드는 친밀감에 이유없이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

술 취한 친구가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언덕을 쏜살같이 내려가다가 그대로 곤두박질 친 일도 있었다.
얼굴을 다 갈아붙인 채 한동안 정형외과 신세를 진다고 녀석은 학교에도 못나왔다. 온 얼굴에 딱지를 얹고 쭈삣쭈삣 나타난 친구 녀석을 매일 쥐어박고 놀려주곤 했다.

연애 할 때는 2인용 자전거를 타고 경주 외곽을 다 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처음으로 자전거를 사 준 것도 남편이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 내 자전거를 가지게 된 게 좋아서 맨날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었다. 화원 촌동네로 이사 오고 나서 자전거는 더욱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자전거는 자동차에 밀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거나 고급스포츠로 탈바꿈하여 아무나 탈 수 없는 것이 됐다.
그렇지만 나는 자전거가 좋다. 지나치지 않은 자전거의 속도가 좋다. 손때 묻은 자전거는 내 손발의 연장이다. 나는 오늘도 꼬질꼬질한 일상이 묻어있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빈다.

* 대구환경연합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5-12 1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