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끈한 곡선의 승용차. 고급사양의 스피커가 달린 그 승용차에 아름다운 여인을 태우고 동해안으로 드라이브를 떠나다. 차창 밖으로 그녀의 긴 머리가 바람에 날린다.’
20대 초반의 철없던 시절, 운전면허를 갓 받아든 대부분의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보았음직한 로망이 아닐까.

이제 서른을 넘어선 내 또래의 친구들은 직장에 들어가서 1,2년이 지나면 제일 먼저 차를 산다. 무리를 해서라도 기어코 차를 사고 만다. 서른이 넘었는데 자기 차가 없는 남자는 백수이거나, 운전면허가 없거나, 아니면 꽉 막힌 스타일의 환경운동가. 아마 이 셋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백수도 아니고(4대 보험 들어가는 엄연한 직장인이다), 운전면허도 있고(10년이 다 되어간다.), 꽉 막힌 스타일의 환경운동가(늘 열려있고, 유연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도 아닌 나는 왜 여태 차가 없을까.

어떤 대단한 가치관이나 투철한 신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두 가지 이유에서인 것 같다.

일단, 내 월급으로 차를 굴린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무리이다. 차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을 제하고 나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등골이 빠지고, 허리가 휘청거리는 등의 신체변화가 즉각 나타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운전하는 일이 너무나 고된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씩 출장 때문에 사무실 봉고를 몰고 지방으로 가는 일이 있는데, 운전하고 나면 정말 피곤해진다. 특히 출퇴근 시간의 대구 시내를 차를 몰고 지나가는 일은 생각만 해도 최악이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로 차량구입 적령기가 되어도 차를 사지 않고(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못사는 것이지만), 여태 버스를 타고 다니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버스 타는 일이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일보다 훨씬 남는 장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저 일단 가격이 싸다는 것이다. 대구시내 대중교통 환승체계가 바뀌고 나서부터는 교통카드 한 장이면,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탈 수도 있고, 지하철도 함께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950원이면 대구시내 어디든 만사 오케이다. 좀 과하게 버스를 탔다 싶어도 한 달 교통비 6만원 정도이면 뽕을 뽑는다. 유지비 한 달 6만원으로 승용차 굴린다는 사람, 눈 씻고 찾아봐도 만날 수 없다. 요것이 가장 매혹적인 경제적 혜택이고.

다음으로 편안하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950원만 내면 기사 아저씨가 알아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태워준다. 갑자기 끼어드는 차를 향해 클락션 빵빵 울려가며 성질부릴 일도, 경찰 아저씨 눈치봐가며 불법 유턴 할 일도, 접촉사고 나서 시내 한복판에서 목소리 높일 일도 전혀 없다.
얼마나 좋은가.
어디 그것뿐인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생각하지 못한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책을 읽을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영어 공부도 할 수 있고, 이도저도 아니면 멍하니 잡념에 빠질 수도 있다. 난 책, 음악, 영어 공부 보다는 잡념에 빠지는 쪽이다. 어제 TV서 봤던 효리 누나도 생각하고, 저녁에 친구들 만나서 어디에서 술 마실까 생각도 하고, 이번 주말에 어디로 놀러 갈까 생각도 하고, 어디 소개팅 건수 들어올 데 없나 이런 생각도 하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혹은 도움 따위 되지 않는 여러 생각들에 빠지다 보면 벌써 목적지에 다다른다(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려 하는데 늘 시간이 부족하다. 항상 아쉽다).
예전엔 버스 하면, 불친절한 기사아저씨, 배차시간 따위 우습게 여기는 버스 회사, 한여름의 뜨거운 버스 안을 떠올렸지만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 무선 마이크 달고 승객들에게 꼬박꼬박 인사하는 기사아저씨도 있고, 정류장마다 버스 오는 시간 안내도 해주고, 여름엔 에어컨도 빵빵하게 틀어준다. 이 정도면 버스 타고 출퇴근 할 만 하지 않은가.

대한민국의 어지간한 성인이라면 다 갖고 있는 두 가지가 나에겐 없다. 하나는 신용카드이고, 하나는 자가용이다.  그 대신 나에겐 GT카드(교통카드)와 508번 시내버스가 있다.
 
당분간은, 아니 앞으로도 오랫동안 자가용 없이 버스를 타고 다닐 것이다.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져들 수 있는 여유,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가로수들의 계절에 따른 변화, 엄마 등에 업힌 어린 아기의 환한 미소, 꾸벅꾸벅 졸다 창문에 머리 부딪히며 부끄러워하는 고등학생의 모습. 버스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이 모든 풍경들을 추호도 포기할 생각 없다.
* 대구환경연합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5-12 17:06)